[스크랩] 레 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 1862
레 미제라블
작가 빅토르 위고
요약 1845년에서 1862년에 걸쳐 완성된 대장편으로, 시대의 풍속이 잘 드러난 위고의 대표작이다.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의 제목 ‘레 미제라블’은 불쌍한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주체에 대한 작가의 분노를 나타낸다.
사회의 악에 굴하지 않고 참다운 선을 실행
굶주린 조카들을 위해 한 조각의 빵을 훔치다가 징역살이를 하게 된 장 발장은 19년 동안 형무소에서 지내다가 46세에 겨우 석방된다. 1815년 워털루 전투가 일어나던 해이다. 남루한 모습을 한 수상한 떠돌이에게 사람들은 모두 냉정하게 대한다. 다만 한 사람, 인자한 주교 미리엘이 그를 사람답게 대접해 주는데,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악이 몸에 밴 장 발장은 주교의 은촛대를 훔친다. 그러나 주교는 이를 용서하며 그에게 선물이라고 준다.
이를 계기로 장은 선과 덕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후 이름을 바꾸고 북부 프랑스에 살면서 마을의 발전을 위해 힘을 기울이던 장은 그 공로와 높은 인망으로 시장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전과자는 사회에 복귀할 수 없는 시대였다. 예전의 장을 알고 있는 냉혹한 형사 자베르는 시장이 된 그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마침 장 발장으로 오인되어 체포된 남자로 인해 위기를 모면한 장은 밤새도록 고민하다가 스스로의 정체를 고백하고 그 남자를 구한다. 장은 재산을 감춘 뒤 다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탈옥해 시장으로 일하던 시절에 만난 불쌍한 창녀 팡탱이 죽을 때 그녀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팡탱의 딸 코제트를 구해 낸다. 코제트는 그때까지 사악한 테나르디에각주[1] 부부 밑에서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코제트와 함께 파리에 정착한 장은 처음으로 사랑하는 ‘자식’을 얻어 인간으로서 더욱 성장한다.
그러나 자베르의 손길이 그곳까지 미치자 두 사람은 한 수도원으로 들어가 은신하게 되고, 코제트는 그 수도원에서 아름다운 아가씨로 자라난다. 이윽고 수도원에서 나와 시내에서 조용하게 살아가는 두 사람 앞에 청년 마리우스가 나타나게 되고,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몰래 서로를 사모하는 사이가 된다. 그 사실을 안 장은 질투심 때문에 괴로워한다.
때마침 1832년 6월, 공화파의 반란이 일어나고 마리우스도 거기에 참여한다. 장도 이 사실을 알고 바리케이드로 가서 스파이 혐의를 받고 잡혀 있던 자베르를 풀어 주고, 부상당한 마리우스를 지하 수로를 통해 구해 낸다. 그 출구에서 다시 만난 자베르는 두 사람을 무사히 바래다준 다음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상처가 치료된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결혼하고, 홀로 남겨진 장은 쇠약해져 간다. 이후 장의 정의와 자애의 마음을 알게 된 마리우스는 코제트와 함께 장을 찾아오고, 두 사람의 사랑 속에서 장은 숨을 거둔다. 그의 머리맡에는 예전에 미리엘 주교에게서 받은 은촛대가 놓여 있었고, 촛대 위에는 촛불이 밝혀져 있었다.
장 발장을 통해 악에 대항하는 양심의 각성과 성숙을 표현
“법률과 관습이 있기 때문에 사회적인 처벌이 생기고, 그로 인해 문명 한가운데에 인공적인 지옥이 생겨나며, 신이 만들어야 할 숙명이 인간이 만든 운명 때문에 헝클어지고 있다”라고 위고는 말했다. 이는 인간이 인간에 대해 행하는 악을 표현한 말이다.
위고는 그와 같은 악을 이 작품을 통해 고발하려 했고, 사회의 악에 대항하는 양심의 싹과 그 성장을 장 발장이라는 인간을 통해 그려 냈다. 이는 인간성이 가진 선의 발전과 완성의 이야기이다. 또한 주인공 장은 ‘민중’의 대표이기도 하다. 『레 미제라블』은 민중을 믿는 작가에 의해, 민중을 위해 쓰였고, 민중에 의해 이해되어 온 작품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당연히 장 발장이지만, 부주인공들도 잊어서는 안 된다. 구상 초기에 위고는 ‘성인 이야기, 남자 이야기, 여자 이야기, 인형 이야기’라는 메모를 남긴 바 있다. 각각 미리엘, 장, 팡탱, 코제트이다.
그러고 보면 미리엘 주교는 장에게 인간으로서 선을 꽃피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창녀인 팡탱은 코제트와의 행복한 생활을 주었으며, 코제트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들은 모두 장의 생애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또한 각자가 자신들의 자리에서 깊은 사랑을 키우며 살았던 사람들이다.
작품 속의 명문장
“형무소가 죄인을 만들어 낸다.”
“평등의 첫 번째는 공정함이다.”
“개혁 의식은 일종의 도덕 의식이다.”
“진보야말로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가난한 생활에 의한 남자의 실추, 배고픔에 의한 여자의 타락, 암흑에 의한 아이들의 쇠약이라는 현대의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 지상에 무지와 비참함이 있는 한 이 책과 같은 글도 쓸모없지는 않을 것이다.” - 『레 미제라블』의 서문
빅토르 위고(Victor Marie Hugo)
프랑스의 시인이자 극작가 · 소설가인 빅토르 마리 위고(Victor Marie Hugo, 1802~1885)는 1802년 나폴레옹 휘하에 있는 군인의 아들로 브장송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각지를 여행했고, 소년 시절 이후에는 파리에 정착해 살았다. 20세에 처녀 시집인 『송가 및 기타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 무렵 문학 세계를 주도하고 있던 낭만주의의 중심적인 존재로 『동방시집』 등을 출판해 작가로서 기반을 닦았고, 1830년에는 희곡 『에르나니』를 상연해 고전파를 물리치고 낭만주의 연극에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그 무렵부터 차츰 인도주의적 경향을 띠기 시작해 『어느 사형수의 마지막 날』(1829) 등을 썼다. 시집에서도 1831년 『가을의 나뭇잎』, 1835년 『황혼의 노래』 등을 통해 내면적인 심화를 보여 주었다. 한편 낭만주의적 역사소설로 중세 성당의 아름다움과 민중의 힘을 찬미하는 『노트르담의 곱추』(1831)를 썼고, 그에 이어서 낭만극을 잇달아 펴냈다.
그러나 20세 때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아내와의 불화, 딸의 익사 등의 가정 문제로 괴로워하다가 아름다운 여배우 쥘리에트 드루에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었다.
1840년 무렵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졌고, 1845년에는 상원 의원에 임명되었다. 1851년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대하다가 국외로 추방당해 그 이후로 19년 동안 영국 해협에 있는 저지 섬과 건지 섬에서 지냈다. 웅대한 자연에 둘러싸인 생활은 그에게 많은 결실을 가져다주어 『명상 시집』, 『여러 세기의 전설』 등과 같은 시집과 『레 미제라블』각주[2] 이라는 대작을 탄생하게 했다.
1870년 제정 붕괴 뒤에 조국으로 돌아와 평화로운 말년을 보내며 철학적인 시와 역사소설 『93년』 등을 발표했다. 1885년에 사망한 뒤 성대한 국장이 치러졌다.
출생 | 1802. 2. 26, 프랑스 브장송 |
---|---|
사망 | 1885. 5. 22,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위고는 프랑스 낭만파 작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로 만년에는 저명한 정치가이자 정치적 저술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가장 유명한 장편소설은 <노트르담의 꼽추>, <레 미제라블>이다. 프랑스 문학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남겼다. 1830년에는 '낭만파 운동의 가장 강력한 정신'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1845년에는 프랑스 왕실의 인정을 받은 계관시인으로, 귀족원 의원으로, 그 후에는 사회에서 추방당한 현인의 역할을 떠맡았다. 그는 권위에 대한 자각을 갖고 자신의 통찰과 예언적 견해를 산문 및 운문으로 기록하여, 마침내 프랑스 모든 도시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겨날 만큼 사랑받는 국민시인이자 온화한 할아버지 같은 모습의 인기작가가 되었다.
프랑스 낭만파 작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만년에는 저명한 정치가이자 정치적 저술가로 활동하여 보나파르트주의와 권위주의를 비난했다. 가장 유명한 장편소설은 〈노트르담의 꼽추 Notre Dame de Paris〉(1831)·〈레 미제라블 Les Misérables〉(1862)이다.
위고가 쓴 엄청난 양의 작품은 프랑스 문학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아침마다 시 100행이나 산문 200장을 썼다고 한다.
1830년에는 '낭만파 운동의 가장 강력한 정신'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1845년에는 프랑스의 계관시인이며 귀족원 의원으로, 그후에는 사회에서 추방당한 현인의 역할을 떠맡았다. 그는 권위에 대한 자각을 갖고 자신의 통찰과 예언적 견해를 산문 및 운문으로 기록하여, 마침내 프랑스 모든 도시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겨날 만큼 사랑받는 국민시인이자 온화한 할아버지 같은 모습의 인기작가가 되었다. 위고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를 위대한 시인으로 인정했지만, 그후 얼마 동안은 그를 비판적으로 무시했다. 그러나 그의 시 가운데 몇 편은 소수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고, 〈레 미제라블〉도 여전히 널리 읽혔다. 소수의 사람들은 그의 시 예술을 칭찬했으며, 그의 너그러운 사상과 따뜻한 표현은 여전히 대중을 감동시켰다.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아크가 '진부함의 영웅주의'라고 불렀던 대로 그는 보통 사람들의 시인이었다. 그는 평범한 기쁨과 슬픔을 단순하고 힘차게 쓰는 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이 민중시인에게는 폴 클로델이 우주에 대한 '지나친 공포를 자아내는 명상'이라고 불렀던 또다른 측면이 있었는데, 즉 〈악마의 최후〉·〈신〉이라는 우울한 2편의 시를 관통하고 있는 불가사의한 두려움이 그것이다. 시인 샤를 보들레르가 말했듯이 위고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 운문의 풍부한 자산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과 운율 및 압운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그의 기교는 프랑스 시를 18세기의 빈곤함에서 구해주었다.
앙드레 지드는 누구를 가장 위대한 프랑스 시인으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유감스럽지만 빅토르 위고"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유감스러울지라도 사실은 어디까지나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이 모호한 판결에 이어 또다른 시인 레옹 폴 파르그는 "빅토르 위고는 미래의 시인"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시간이 갈수록 빛을 내는 시인'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시인이자 초현실의 시인인 빅토르 위고는 일부가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