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은 예부터 남녀의 밀회의 장소였다. 그래서 보리밭 하면 으레 로맨스를 떠올리고 거기에 얽힌 성풍속도가 연상된다. 여북했으면 '비단 속곳 입고 보리밭 매러 간다', '보리밭 머리만 잘 지키면 일 년 농사 거뜬하다'는 속담이 생겨났을까. 청춘남녀가 보리밭에서 로맨스를 즐겼고 어쩌다 남의 눈에 띄면 입막음용으로 곡식을 퍼다 주었다는 말에서 유래한 속담이다. 이숙자(1942-)는 보리밭 화가다. 보리밭만 그렸다. 청맥과 누렇게 익은 황맥, 엉겅퀴와 유채꽃·개망초·누런 황소와 나비까지 곁들여 천변만화의 보리밭을 연출했다. 흥미를 끄는 것은 '이브의 보리밭 90-3(1990)'이 있다. 90년대 이후 보리밭에 누드를 접목시킨 시리즈 중 대표작이다. 보리밭과 누드, 엉뚱한 조합이다. 전라의 여인이 헝클어진 보리밭에 엎드린 채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다. 몽환적이고 에로틱한 분위기다. 그의 작품 중에는 '이브의 보리밭 90-3'과 달리 대담한 포즈에 여체의 은밀한 부분까지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도 있다. 하나같이 당당한 표정이 압권이다. 보리밭 누드는 단순히 말초적 신경을 자극하는 에로티시즘이 아니다. 이브의 보리밭은 근현대사의 한 단면이다. 그만큼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얘기다. 보리밭은 뻐꾸기와 종달새의 노래가 정겹던 향토적 정서와 배고픔의 상징인 보릿고개 애환을 은유한다. 민초들에게 보리밭은 가난했던 시절 보릿고개 너머 곡식이 여물어 가는 희망이자 믿음을 상징한다. 민족의 애환과 정서, 한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이다. 그림 속 누드는 신분과 제도, 남성 중심 사회의 불합리한 인습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거대담론인 페미니즘(여성주의)의 표징이다. 작가도 인터뷰에서 "내 그림 속 발가벗은 이브는 내가 살아오면서 갈등했던 여성의 굴레와 인습에 대한 저항의식이 형상화된 나의 자화상이 아닐까 한다. 이 운명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인습에 저항하며 도전하는 여인상이 내 화면의 이브의 모습"이라고 피력한 바 있다. 서울 출신인 작가는 공모전 스타다. 1980년 국전과 민전(중앙미전)에서 연이어 대상을 차지했다. 관전과 민전에서 연거푸 대상을 탄 여류화가는 박래현과 둘뿐이다. 충남문화재단 문화사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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