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낳은 후궁들(최선경)
* 무수리 : 궁중의 최하위 신분으로 궁녀 나인들의 세숫물을 떠 주거나, 전각 밖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퍼 나르는 일을 한다. 힘세고 일만 잘 하면 누구나 할 수 있고 결혼, 신분에 관계가 없다. 고려시대 몽골에서 고려왕실에 시집와서 여종을 부르던 말이 정착된 것이다.
? 영조의 어머니 숙빈(최복순) 은 숙종의 후궁 중에서도 서열이 최하위다.
? 장옥경(장희빈) 궁녀, 숙종의 후궁에서 왕비 희빈으로 승격 후 경종(20대 왕) 생산, 후궁 숙빈 최씨가 영조(연잉군, 21대 왕) 을 임신하였을 때 결박하여 독을 거꾸로 세워 가두고 죽기 직전에 발각, 폐위 단서 제공
? 숙빈 : 고아(가족 돌림병으로 사망 추정, 민씨 보살핌(정읍현감의 딸 ), 민씨 왕비 간택(인현황후) 시 궁으로 들어가 무수리가 됨, 인현왕후 폐비 후 복권시 결정적 증언으로 숙종 마음돌림, 이 때는 무수리 신분. 화경 휘덕 안순 숙빈 영조 48년, 무수리 숙빈 최씨가 어머니인 영조도 출신성분에 대한 콤플랙스가 있었다.
? 사도세자의 죽음은 노론과 소론파 대립에서 죽음의 그림자는 시작되었으며, 영조 대리청정 중 세자가 내시 때려 죽인다던지, 승려와 기생을 궁으로 불러들여 연회를 여는 등 파행이 많아지면서 죽음을 스스로 예견하였다. 생모가 대의를 위해 영조에게 대처분을 요청했고, 이를 승인 명령을 내린 사람은 아버지 영조 였으며, 뒤주형은 장인(홍봉한)의 주청으로 영조가 하락했고, 세자빈 혜경궁 홍씨도 동조 내지는 전혀 말리지 않았다.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며 정치는 아버지 엄마 마누라도 때론 적이다. 세자 아들 정조(22대 왕)는 아버지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슬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