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용 5(불멸의 인간)
** 코르시카 너절한 촌놈→ 소위 → 중위 → 대위→ 준장→ 원정군사령관 → 제1통령 → 황제 → 대제 → 세계의 대제(유럽)
** 원정 승리 후 강제 평화 조약, 형제들에게 왕위 물려줌(조제프- 스페인, 루이 - 네덜란드, 뤼시랭 -로마, 등등)
프랑스를 지배하여 유럽연합을 세우는데 능력없는 형제들을 기용한 것에 "나의 실수 중 하나."라고 인증하였다.
** 대군을 이끌고 원정시 선두에 있었으며, 병사들과 같이 잠 자고, 같이 먹고 생활하고, 황제로서의 지위는 유지하지만 모범을 보였다. " 잠들어 있는 병사들의 꿈을 가지고 나는 계획을 세운다."고 했다.
**러시아 원정 : 모스크바에 입성하여 평화조약 체결하려 했으나 러시아군, 귀족 퇴각 후 도시 불타고 있음, 야영 중 불길함을 느끼고 퇴각결정, 퇴각로에서 러시아군 저항, 나폴레옹 파리귀환결정, 황제귀환 마차와 근위대 극비 출발(1812.10.19) , 프랑스 국내 나폴레옹 전사 대비 중, 10월 19일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독일 프로이센과 폴란드를 거처 12월 18일 파리 도착할 때는 보좌관, 근위대가 대부분 얼어죽고, 병들어 죽고, 굶어 죽어 보좌관과 근위대 2명이었다. 처음에는 궁에서 이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 전쟁에서 몰락이 시작된 듯하다. 40만명이 출병하였지만 3만명이 돌아왔다.
*** 나폴레옹은 죽을 때도 전쟁, 승리를 생각했다. 왜, 속국 코르시카인에서 프랑스인으로 선언 후 프랑스를 통하여 유럽을 지배하고자 했다. 능력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장 수가 많고 가장 가난한 계층인 민중의 정신적 육체적 행복을 꿈꿨다. 생도시절 루소의 고백론을 읽을 때는 작가가 되고 싶어하기도 했지만,
** 1814.4.6 상원과 입법원은 유렁동맹군에게 패한 나폴레옹을 강제 폐위시키고 4월 20일 엘바섬으로 유배시켰다. 이 섬에서 소규모 군사 재정비 1815.2.26 탈출, 파리까지 입성하는데 총 한번 쏘지 않고 군중지지와 전진하면서 프랑스 병사의 지지를 받아 파리탈환하지만 6월 18일 워털루에서 영국과 연합군에 패하여 유배지로 가는 중 포로가 된다. 백일 천하 황제로 막을 내린다. 2차 퇴위, 세인트 헬레나 유배지로 떠나 회상록을 집필한다.
** 1차 퇴위 후 군사를 일으켜 명예를 회복하자고 제의했으나 지금은 내전이 불가피하다며 거절한다. "나는 내전은 원치 않는다." 이집트 원정중 파리 복귀 후 쿠데타는 평화쿠데타였다. 그 어떤 무력충돌없이 상원과 입법원으로부터 제1통령을 선출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군중의 지지를 스스로 만들어낸 것은 그 어떤 사람도 내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이였다.
** 나폴레옹은 "권력을 빼았았던 것이 아니라 나라의 소청에 의해 왕관을 받아들였을뿐" 이라고 했으며, 병사들의 황제, 농민들의 황제, 평민들의 황제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지주귀족계급과 왕당파는 나폴레옹을 "찬탈자, 식인귀, 사나운 짐승"이라고 했다.
*** 수많은 병사들의 희생과 평화조약으로 얻는 전리품 등 부작용도 있었지만 유럽 전역이 전제군주 왕정에서 다음 단계로 진보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민중이 정부를 선택하고 국민의 동의를 받아야 합법 정부가 되는 길을 연 것이다.
** 나폴레옹은 한 벌의 제복으로 만족했다. 어떤 부도 개인적으로 축적 안했다. 전리품은 모두 국고로 했다. 그는 가족을 사랑했다. 인간적이고 가정적이었다. 그리고 프랑스인이 되고자 했다.
개선문(2008년) : 1806년 나폴레옹의 명에 의하여 건립시작, 1836년 완공(1821년 5월 5일 나폴레옹 사망)
개선문 안쪽 옆 벽면에 새겨진 697명의 장군 이름과 174개소 전쟁터이다.
꽁꼬르드 광장(프랑스 대혁명 때 루이 16세와 마리 앙뚜아네뜨가 여기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나폴레옹은 포병 중위 시절이다.)